가장 먼저 걸었던 나라가, 가장 비싼 부품을 쥔 채 무대 뒤로 물러났다. 그 역설의 안쪽을 들여다본다.
5편의 끝에서 우리는 미국 군단의 발밑에 '바다 건너의 부품'이라는 약점이 깔려 있다고 했습니다. 그 바다 건너의 첫 번째 무대가 바로 일본입니다. 그런데 일본을 들여다보면 곧 묘한 역설과 마주하게 되는데, 1편에서 보았듯 휴머노이드라는 개념을 세상에 처음 선보인 나라이자 한때 ASIMO로 그 대명사였던 일본이, 정작 오늘의 화려한 완성품 경쟁에서는 한발 물러나 있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러나 있는 듯 보인다'는 표현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무대 위의 주연 자리는 내려놓았을지 몰라도, 무대 뒤에서 모든 배우의 몸을 움직이는 가장 비싼 부품은 여전히 일본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편은 바로 그 조용한 강자의 두 얼굴, 곧 후퇴한 듯한 완성품과 여전히 굳건한 부품을 함께 들여다봅니다.
겉으로 드러난 풍경부터 보겠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던 ASIMO는 1편에서 보았듯 2018년에 독자 개발이 마무리되었고, 2022년 마지막 시연을 끝으로 무대를 떠났습니다. 한 시대를 상징하던 로봇의 우아한 퇴장이었지만, 동시에 일본이 완성형 휴머노이드 경쟁의 최전선에서 물러나는 장면처럼 비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일본 기업들이 손을 놓은 것은 아닙니다. 도요타는 연구 조직을 통해 사람을 돕는 로봇을 꾸준히 실험해 왔고, 가와사키는 독자적인 이족보행 기체를 선보였으며, 소프트뱅크는 한때 페퍼라는 감정 인식 로봇으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다만 이들 가운데 누구도 테슬라나 피규어처럼 '수백만 대 양산'이나 'AI 우선'이라는 공격적 구호를 전면에 내걸지는 않았고, 그래서 바깥에서 보기엔 일본이 한 박자 느린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시선을 완성품에서 부품으로 옮기는 순간, 풍경은 완전히 뒤집힙니다. 4편에서 '가장 비싼 한 줌'이라 불렀던 정밀 감속기, 그중에서도 하모닉 드라이브라 불리는 핵심 부품의 세계 시장을, 오랫동안 일본 기업이 사실상 주도해 왔기 때문입니다.
위 그림이 보여 주듯, 겉의 로봇이 미국 것이든 중국 것이든 그 로봇이 한 걸음을 떼는 순간 관절 안에서 회전하는 가장 비싼 부품 상당수에는 일본 기업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모닉 드라이브 시스템즈는 부품의 이름을 사명으로 굳혔고, 나브테스코는 또 다른 방식의 정밀 감속기에서 강자이며, 이들이 만든 작은 톱니 장치가 없으면 세계의 어떤 휴머노이드도 정교하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감속기만이 아닙니다. 관절을 돌리는 정밀 모터에서도 니덱을 비롯한 일본 기업이 오랜 강점을 쌓아 왔고, 로봇의 자세와 힘을 감지하는 각종 센서, 그리고 그 모든 부품을 정밀하게 깎아 내는 제조 기술의 깊이에서도 일본은 여전히 두텁습니다. 화려한 인공지능 모델은 미국이 쥐고 있을지 몰라도, 그 인공지능의 명령을 실제 물리적 움직임으로 바꾸는 하드웨어의 상당 부분은 일본의 정밀 제조업 위에 서 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일본 산업이 오래 걸어온 길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눈에 띄는 완성품보다 보이지 않는 부품의 품질에 집착하는 이른바 '모노즈쿠리'의 전통, 그리고 자동차와 정밀기계 산업에서 다져 온 공급망의 깊이가, 휴머노이드 시대에 들어 다시 한번 일본을 부품의 강자로 세워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조용한 우위가 영원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첫째 위협은 중국입니다. 2편과 4편에서 보았듯 중국은 물량과 가격을 무기로 감속기마저 빠르게 국산화하고 있고, 일본이 오래 누려 온 과점은 그만큼 빠르게 잠식되고 있습니다. 둘째 고민은 더 근본적인데, 부품 공급자라는 안전한 자리에 머무는 동안 정작 가장 큰 가치가 모이는 인공지능과 완성품의 왕관을 미국에 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입니다.
다시 말해 일본은 '관절은 우리가 만든다'는 견고한 해자를 가졌지만, 그 해자가 둘러싼 성의 가장 높은 탑은 다른 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가장 먼저 걸었던 나라가 이 딜레마를 어떻게 풀어 갈지는, 앞으로 휴머노이드 산업의 지형을 가르는 또 하나의 변수입니다.
일본은 가장 먼저 걸었던 나라이자, 지금은 세계 로봇의 관절을 조용히 쥔 부품의 강자입니다. 화려한 무대의 주연은 아닐지 몰라도, 그 무대가 돌아가게 하는 가장 비싼 톱니를 만드는 손이 여전히 일본에 있다는 사실은, 이 산업을 단순한 '미국 대 중국'의 구도로만 볼 수 없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서 한국은 어디에 서 있을까요. 다음 편의 무대는 한국입니다. 일본처럼 부품의 야심을 키우면서도 동시에 미국의 가장 상징적인 로봇 회사를 소유하고, 삼성과 현대라는 거대 기업이 직접 뛰어든 나라. 부품과 완성품 사이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한 한국의 이야기로 이어가겠습니다.